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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취미

[책]열하일기,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북드라망)

by 해리보쉬 2023.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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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아니 조선판 서유기입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나라시절에 중국으로 떠나며 보고 겪은 일들

불교 경전을 구하러 가진 않았지만 달라이 라마도 만나고 새로운 풍습과

조선과의 현실 비교는 경전만큼 가치가 있겠습니다.

상당히 진취적인 인물로 당대의 수능시험

과거시험에 대한 비판과 조선에 대한 비판은 재미있습니다.

해학적인 표현도 많고 거의 400년 전의 인물임에도 그 행동과 언행에

공감이 많이 가는 부분이 많고 시대상은 현재와 비견될 만큼 유사한 부분도 있어 재미있습니다.

<나무 위키 열하일기 자료>

정조 4년(1780) 연암 박지원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음에도 사절단으로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조부마로,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이다.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 군관(일종의 개인 수행원)자격으로 사절단에 합류했다.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고를 수 있었다.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해도 되었기에 8촌동생을 데려간 것. 이들은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1]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2]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3]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 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여졌다.

원래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다 왔다. 일정이 촉박해 상당히 하드코어한 여행을 해야 했다. 이때의 고생은 박지원의 산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4]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5]에 생생하게 실렸다.

박지원이 직접 집필한 초고본은 행계잡록(杏溪雜錄)을 비롯한 문집으로 남았는데, 이 초고본을 단국대학교에서 소장했다. 그 외의 필사본과 근대 이후의 인쇄본 등이 전국에 산재했다.

열하일기는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1932년에야 연암집으로 활자화되었다. 초고본부터 문체반정과 같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로 너무 적나라한 표현 등은 삭제되거나 표현을 달리하였고, 지동설이나 천주교에 관한 언급은 문단째 삭제되었다가 나중에 나온 필사본에는 다시 복원되기도 하고 필사가에 따라 원문에 없는 명에 대한 극존칭을 더하거나 문체를 제각각으로 바꾸는 등 정본이 없어 아쉽다.

실제로 산장에 가보면 상당히 크고 아름답다. 베이징의 자금성이 웅장하다면, 피서 산장 역시 중국 스케일이기 때문에 크긴 한데 나름 정원과 나무에 아기자기한 면이 있고 궁전보다는 이화원의 느낌에 가깝다. 현대에도 현지 중국인들이 여름에 많이 와서 노닐고 있다. 허베이성 북부의 지급시인 청더에 남은 그 이궁과 티베트 불교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실제 국립중앙박물관의 열하일기)

개정신판이라는 것은 초판은 이미 완판이라는 것인데

책이 그렇게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는 편은 아닙니다.

굳이 써야되었나 싶을 정도의 전문적인 단어사용이나 이야기가 좀 장황한 편이라 독자를 위해 쓴건가 학자로서 자신을 위해 쓴거 싶을 정도

책의 중간중간 삽화나 마지막부분에

당시에 방문했던 지역들의 현재 사진은 좋았습니다.

두번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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